윤세주의 3.1 운동 참여와 밀양 시위 주도
1919년의 3.1 운동은 윤세주가 본격적인 항일독립투쟁의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밀양군에서도 3월 13일의 읍내 시위를 필두로 4월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 첫 시위의 준비와 진행을 윤세주가 주도한 것이다.
고종 황제 인산과 서울 시위 참여
1919년 2월에 세상을 떠난 고종황제의 인산 날짜가 3월 3일로 잡혔음이 알려진 후, 윤세주는 일곱 살 위의 족형(族兄) 윤치형과 함께 상경했다. 아마도 부친이 인산 장례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장례일을 며칠 앞둔 3월 1일, 서울에서는 33인 민족지도자에 의한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윤세주가 이를 외면하거나 방관만 했을 리는 없고, 시위에 합세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귀향 후 밀양 만세 시위 준비
넘치는 감격과 ㅁ의분에 젖어 귀향한 윤세주와 윤치형은 전홍표를 찾아가 서울의 시위 상황을 설명하고 밀양에서의 만세시위 거사에 관해 자문하였다.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양인은 김병환(金炳煥), 이장수(李章守), 설인길(薛仁吉), 박만수(朴萬守), 윤보은(尹輔垠), 김소지(金小池), 최종판(崔鍾寬), 박상오(朴尙五), 정동찬(丁銅燦), 정동준(丁銅俊), 김상이(金尙伊) 등 여러 동지를 규합하고, 3월 11일과 12일에 정동찬의 집에서 수차례 회합하며 거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 인쇄용 등사판을 부북면 사무소와 밀양면 사무소에서 훔쳐낸 다음, 밤중에 위북산(尾北山)에 올라가 병풍을 둘러치고 밤을 새워 선언서 수백 매를 찍었다. 태극기도 수백 개를 만들어 선언서와 함께 석정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독립선언서 인쇄와 만세 시위 결행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된 만세시위는 드디어 3월 13일에 결행되었다. 당시 시위 상황과 경과를 전해주는 여러 문헌 기록의 내용은 대체로 일치하나, 부분적으로 상이한 점도 보이고 검증을 요하는 서술도 더러 있다. 일단 이들 기록을 문헌의 발간순으로 하나씩 옮겨 적어 본 후에 종합하여 정리하고, 검토를 요하는 부분은 따로 다루겠다.
시위 상황과 기록 정리
- 3월 13일 오후 1시 30분, 약 1천 명의 군중이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도로에 집결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독립만세”라고 적힌 대기(大旗)를 선두에 세우고 각자 구한국기(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는 가운데 읍내를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보통학교 교정에 들어가 교실 내에 종이로 만든 구한국기를 나누어주며 생도들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튿날인 14일에 동교 생도 160여 명이 동요하여 교직원을 물리치고 학교를 탈출해 구한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연호하고 행진했는데, 읍내 주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약 200명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
- 3월 13일 오후 1시 반경에 수천 명이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대오를 정비한 후 행진을 시작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하였다. 현지 경찰은 부산으로 지원을 요청하여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해 밀양으로 급파되었다. 시위대는 오후 5시에 해산하였는데, 지휘자 7인은 이날 오후 9시경 체포되었다.
- 3월 13일 오후 2시경, 수천 명이 태극기를 들어 올릴 때, 현지 경찰은 헌병과 수비대를 급파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다.
- 3월 13일은 읍내 장날이었는데, 윤세주와 그의 동지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숨기고 시장으로 나갔다. 대형 태극기를 펼치자 군중들은 삽시간에 모여들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동안 동지들은 준비한 태극기와 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언서 낭독 후 윤세주와 동지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를 누비고, 대중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그 기세는 강산이 진동하는 듯하였다. 시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무산에서 급파된 일본군 헌병과 수비대 10여 명이 당지 헌병과 합세하여 시위 행렬 속으로 뛰어들어 군중을 난타하고 의거를 저지시켰다.
- 3월 13일 밀양 장날, 시위의 주동 인물들은 장을 가장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숨긴 채 밀양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1시 30분, 주동 인물들이 대형 태극기를 펼쳐 들자 수천 명의 군중이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도로상으로 모여들었다.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군중 시위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이에 주동 인물들은 재빨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이들 군중은 주동 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3창한 후, 이어서 만세 시위로 들어갔다. ‘독립만세’라고 대서한 ‘대기’를 앞세우고 주동 인물들을 선두로, 태극기의 물결 속에 군중의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군중 시위 대열이 읍내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교실에 종이 태극기 수십 매를 투입하였다. 이때, 부산에서 급파되어 온 일본군(日軍) 헌병과 수비대 10여 명은 현지 헌병경찰과 합세하여 군중 시위대에 뛰어들어 총검으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왔으므로, 군중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군경의 주동 인물 색출은 계속되었고, 밀양읍 거리는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3월 14일에도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일제히 분기하여 태극기를 들고 교사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거리로 뛰쳐나와 다시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수백 명의 애국 군중(일 군경 기록에는 200명)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는 오래 계속될 수 없었고, 주동 인물들은 구속되었다.
일본군의 탄압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
상술한 1, 2차 거사가 일어나자, 일제는 부산 일본군 철도엄호대를 밀양읍으로 급파하여 밀양 일대에는 철통 같은 경계망이 펼쳐졌다. 밀양군의 운동은 3월 13일에 읍내에서 약 천여 명의 군중이 대기(太旗)를 세우고 시위 운동을 일으킨 데서 절정에 달하였다. 이날 80명이나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먼저 다음과 같은 점들이 사실로서 확인된다: ① 3월 13일에 밀양 읍내에서 주민들의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이튿날에도 주민들의 호응 속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감행하였다.
② 13일의 시위 현장에서는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과 함께 시위대의 가두행진을 이끌었다.
③ 현지 헌병경찰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및 수비대 병력에 의해 시위는 가차 없이 진압되었고, 주동자 다수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