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윤세주 (1900-1942)
석정 윤세주 (1900-1942)는 일본 제국주의 압제하의 식민지 조선이 낳은 걸출한 민족해방 운동가이자, 뛰어난 혁명이론가이며, 항일투쟁의 제일선 전사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은 중국 땅 태항산록에서 고귀한 피를 뿌려 조·중 연합전선 대오의 동지들을 구하고 숨져간, 조선의용대의 한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1930년대 해외 한인 혁명운동자들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족혁명당의 한 산과역이자 명철한 이론가이며 탁월한 조직가였고, 민족혁명당 조직과 기풍 속에 녹아들어간 의열단 운동사 17년(1919-1935)의 시작과 끝을 김원봉과 함께 열고, 또한 역전의 용장으로서 그 감투정신과 혁명이념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항일독립투쟁의 대부분 역정은 의열단 운동사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 놓고 살펴보아야만 전후 연관이 제대로 파악되고 총체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해진다.
민족해방 운동가이자 혁명이론가로서의 윤세주
그러면서도 윤세주의 독립전선은 오직 해외에서만 구해지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었음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32년에 고국을 떠나 중국 망명의 길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국내 현실 속에서 가능한 모든 방책과 수단을 취하고 동원하면서 일제에 대항하고 싸워간 불굴의 투쟁가이자 일급 전략가였다. 약관 19세의 나이로 독립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고 신문을 통한 선전전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법정과 감옥까지 저항과 투쟁의 공간으로 삼아 일제 권력에 맞서 싸우는 기개를 보여주었고, 합법공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신간회 운동의 진보파 성공을 위해 분투 헌신하면서 언론투쟁도 열정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전선과 윤세주의 활동
해내·외를 통틀어 윤세주의 걸음걸음은 식민교육 거부투쟁에서부터 시작해 만세시위 운동, 비밀결사운동, 의열투쟁, 언론투쟁, 민족통일전선운동, 혁명당 조직운동, 노농대중운동, 군사운동, 국제연대운동, 옥중투쟁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과 광대한 영역의 어느 한 부분에도 미치지 않은 대가 없었다. 이처럼 윤세주의 일평생 삶은 민족의 자주독립 쟁취를 위한 험난한 길을 걸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러나 그 항일독립투쟁 이력과 공적(功績)은 여전히 그 전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였다.
다양한 독립운동 참여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둘 때, 그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전면적으로 복원하여 새롭고 올바르게 평가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한 과제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일단은 의열단원으로서의 윤세주의 활동과 망명 전 국내 체류 시기의 항일독립투쟁의 발자취를 두 개의 주요 축으로 삼되, 생애사(life history)적 접근을 통해 그의 삶과 가족사까지 실증적으로 복원해 보고자 한다.
윤세주의 사상과 행동 복원의 필요성
서술 내용의 시간적 범위는 그의 출생부터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의열단이 해소되어 그 공식 역사가 마침표를 찍은 시점까지로 한정하였다. 관련 분야의 연구 성과들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과 새로 얻고 찾아낸 자료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그의 독립투쟁사, 혁명운동사의 전체 흐름과 중요한 사실들, 그리고 그 속에 배어 있던 인간적인 체취와 풍모까지도 정확하고 상세히 밝혀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연구의 범위와 방법
석정의 40여 년 일생은 생물학적 기준이나 순수한 개인사의 견지에서는 출생 후 10대까지의 유소년기, 10대 말에서 20대까지의 청년기, 30대부터 순국 때까지의 장년기의 세 단계로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그의 삶을 줄곧 특징지었던 역동성과 활동성을 충분히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그의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던 주요 활동 공간을 기준으로, 10대 소년 시절부터 20대 초까지의 국내 활동기와, 30대 초엽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운동에 전념한 이후의 해외 활동기로 나눈 후 그 안에서 성립했던 여러 활동 국면을 감안해 소시기들을 설정해 봄이 좋을 듯하다. 이 글의 목차 설정과 내용 구성은 그 점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졌음을 미리 밝혀둔다.
윤세주의 출생과 가계
윤세주는 1900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 880번지 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회규(尹熺奎)와 모친 김경이(金卿尹)의 슬하에는 다소 긴 터울의 3남 1녀가 이미 있었고, 석정은 늦게 본 4남이면서 형제 중 막내가 되었다. 형들의 이름에 들어간 항렬자인 ‘치(致)’ 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는 붙여지지 않은 채, 호적에는 ‘소룡(小龍)’으로 이름이 등재되었고, 족보에는 ‘세주(世青)’로 올려졌다. ‘석정(石正 또는 石鼎)’은 성인이 된 후에 사용한 호였고, 국외 망명 이후에는 세수(世洙), 정호(正浩), 정수(正洙), 소용(小用), 석정(石井 또는 石亭), 석생(石生), 석전(石田) 등 여러 이명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기도 했다.
윤세주의 가문과 부친 윤회규
윤세주의 가계는 고려 예종 때 사람인 윤양비(尹良庇)를 시조로 하고, 그의 5세손 윤소종(尹紹宗)을 파조로 하는 무송윤씨(茂松尹氏)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에 속했는데, 세주는 시조의 25세손이었다. 원래는 전라북도 무장현(茂長)이 가문의 세거지였는데, 세주의 8대조인 윤이빙(尹以聘)이 밀양으로 이주하면서 그 후손들은 누대로 밀양에 살아왔다. 세주의 3대조까지는 생전 이력이 확인되지 않으나, 조부 윤병흡(尹炳洽; 1826-1885)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부친 윤회규(1859-1930)는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계속 승진하여 1906년에는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시종원(待從院)의 시종직을 맡았다.
부친의 영향과 항일 의식
부친이 시종직에 있던 시절을 보면, 그는 고종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에 고종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퇴위할 때, 윤회규도 시종직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윤회규는 고종에 대한 숭경심과 함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리 강했으리라 짐작되며, 그 심경은 자녀나 친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송윤씨 일문과 독립운동
한편, 1920년대 초에 만주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의 참의장을 지낸 윤세용(尹世茸)과, 역시 만주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유력 지도자이자 대종교 2대 교주였던 윤세복(尹世復), 그리고 나중에 석정과 함께 밀양 3·1 운동을 주도하고 초기 의열단 활동에 참여했던 윤치형(尹致衡)이 모두 밀양의 무송윤씨 일문이었다.
윤세주와 약산 김원봉의 어린 시절
세주가 태어나고 자란 본가는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의 집과 매우 가까웠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한곳에서 놀고 자라났으며,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특별히 가까웠다. 세주와 약산은 4년제의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에 함께 다녔다. 약산은 동네 서당에 다니다가 열한 살 때인 1908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세주는 8, 9세 무렵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니, 아마도 1908년경이었을 것이다.
일본 병합에 대한 저항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주와 약산을 비롯한 소년들은 함께 모여 ‘통곡’하며 나라를 잃은 슬픔을 나누었다. 그들은 일본어 수업 시간마다 일부러 결석하며 저항의 의지를 표출했다. 이듬해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는 일본기를 학교 뒤편의 연못에 던져 넣는 의거를 세주와 약산이 주도하여 감행했다. 일본인 교장은 크게 분노해 어린 학생들을 불러 구타하고 고문하며 자백을 받아내려 했지만, 학생들이 끝까지 부인하여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경남도청에서는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 관리를 학교에 보내어 훈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약산과 세주의 동화학교 편입
그 후 약산과 세주는 공립보통학교에서 “노예화 교육을 더 이상 받기 싫다” 하여 자퇴하고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학했다. 동화학교는 민족지사 옥강(玉岡) 전홍표(全鴻杓)가 광무 연간에 밀양성 안 내일동의 옛 군관청 자리에 설립한 중학교 과정의 학교였다. 두 사람은 보통학교 졸업장이 없었으므로 중학과정 수학 자격이 없었지만, 애국학생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입학이 허락되었다.
동화중학에서의 민족교육과 애국사상
동화중학 재학 중, 세주는 보통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의 정신을 깊게 배웠다. 이는 교장 전홍표가 철저한 애국사상을 늘 강조한 덕분이었다. 전홍표는 날마다 학생들에게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플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다. 너희들이 분기하지 않으면 누가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룰 것인가?”라며 훈화하였다. 그때마다 약산과 세주를 비롯한 어린 학생들은 마음속으로 “싸우고 또 싸워서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연무단 조직과 체력단련
전홍표의 뜻을 받들어 세주와 약산은 동료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적극 고취하는 한편, 교내에 비밀 애국단체인 연무단(練武園)을 조직하여 동료들과 함께 체력 단련에 힘썼다. 여름철 땡볕 아래서도 강변 모래밭에서 축구를 했고, 겨울 아침에는 동산에서 냉수마찰을 했다. 한편으로는 위인전기, 조선 역사와 지리, 「육도삼략(六韜三略)」 등의 책을 구해 서로 돌려가며 열심히 읽었다. 단군 개천일에는 약산과 세주가 상의하여 연무단 동지들과 함께 거리에서 개천가를 고창하며 경축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동화중학 폐쇄와 전홍표의 가르침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동화중학과 전홍표를 불온한 학교와 위험 인물로 지목하고 계속 주시하더니, 급기야는 재단법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이에 약산과 세주 외 몇몇 동료들은 분한 마음을 품고 열흘 동안 고을을 누비며 돈을 모았다. 어렵게 모은 80원을 들고 나타난 세주와 약산이 “이것으로 학교를 다시 운영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전홍표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학교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은 경제적 곤란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배일 문제’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결국 폐쇄령은 감행되었고, 세주의 동화중학 생활은 2년 만인 1912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동화중학 폐교 후 세주의 행로
동화중학 폐교 후 한동안 집에서 지내던 세주는 서울로 올라가 오성중학(五星中學)에 입학했다. 약산도 1913년에 중앙학교 2학년으로 편입학했다. 오성중학을 졸업한 세주는 귀향하였고, 얼마 후 창녕의 진양 하씨 집안의 한 살 아래 규수인 소악과 결혼했다. 약산이 1년 만에 중앙학교를 그만두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1916년 중국으로 떠난 것과는 대조적인 행로였다. 약산은 회고록에서 “나는 중국에 나왔으나, 석정 동지는 국내에서 동지들과 연락하며 애국운동을 부단히 진행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주도 일찍부터 중국으로 나갈 계획이 있었으나 부모님의 뜻으로 일찍 결혼하게 되어 결국은 국내에 머물게 되었던 것일까?
세주의 비밀결사운동 관여 가능성
세주는 당시 창립된 비밀결사운동에 상당 부분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밀양의 선배들인 황상규(黃尙奎), 김대지(金大地), 윤치형 등이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의로 결성했던 의열사(義烈社)나, 1909년경 안희제(安熙濟)에 의해 결성된 대동청년단(大東青年團)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확증할 자료가 없어 아쉽다.